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카라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전투는 다음날인 28일 오스만군이 티무르군에 선공을 걸면서 시작되었다. 급하게 돌아와서 피로한 상태였음에도 티무르군이 이미 앙카라 일대의 물줄기를 돌려 수원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티무르군을 돌파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예지트의 패착이 되고 말았다. 앙카라에서 급하게 돌아온 이상 어쩔 수 없이 앙카라에 도착한 그 날 하루를 쉬고 다음날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사이 앙카라 인근의 마을들을 약탈하느라 흩어져있던 티무르의 군대를 재규합할 시간을 줘버린 것이다. 차라리 피로한 상태였더라도 앙카라에 도착한 27일 그날 바로 티무르를 공격했으면 바예지트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이때 티무르는 오스만군이 혼성 부대라는 약점을 찔러, 미리 아나톨리아 일대의 튀르크 출신 병사들에게 밀사를 보내 이간질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적중했다.[* 상술했듯이 바예지트 1세는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공국들을 하나하나 정복해나가고 있었는데, 티무르는 형식상으로나마 오스만에게 공국들을 모조리 재건한 다음 건드리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니 튀르크계 공국 출신 병사들이 티무르의 설득에 바로 넘어간 것은 당연한 일.] 급한 행군으로 인해 몹시 피로한 상태였던 오스만군은 그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공세를 감행하는 근성을 보였으나, 튀르크계 공국들에서 파견한 병사들의 이탈이 계속되면서 결국 자중지란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튀르크군 뿐만 아니라 오스만군의 중핵이었던 [[시파히]]까지 티무르군에 항복하기 시작하자 오스만군의 붕괴는 더이상 막을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패주하기 시작한다. 이에 티무르군은 전과확대를 기도했고, 바예지트 1세는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저항을 시도해 보았으나 티무르는 인도산 전투 코끼리 부대를 내세워 이를 단박에 짓밟았다. 이 때에 튀르크군이나 시파히보다 오히려 유럽 봉신군이 오스만 술탄국에 더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좌익을 지휘했던 쉴레이만 또한 세르비아 기사단의 구원을 받고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했다고 한다. 이들은 티무르군의 화살로도 뚫리지 않는 중갑[* 당시 정황을 묘사한 기록을 보면 이들 세르비아 기사단은 검은 색의 갑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대장간에서 불리기를 하지 않아 쇠가 검은 색으로 나온 이런 형태의 갑옷이 당시 유럽 기사들한테서 인기를 얻었다.] 탓에 티무르군의 진형을 여러 차례 헤집어놓는 등, 그나마 가장 크게 활약했으며, 티무르로부터 "마치 사자처럼 싸웠다"라는 칭찬까지 들었다.[* 다만 세르비아 기병들의 대부분은 [[독일인]]이나 [[카탈루냐 용병]] 출신들이었다. 실제로 중세 유럽에서 독일인들로 구성된 [[중장기병]]들이 여러 나라들에서 [[용병]]으로 자주 고용되기도 했다.] 전황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자 바예지트 1세는 도주를 기도했으나 실패, 포로로 잡혔다. 단 하루 만에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던 오스만 술탄국의 주력 군대가 힘 한번 못써보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